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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13 Concistoro Ordinario pubblico per il voto su alcune Cause di Canonizzazione 2025.06.13 Concistoro Ordinario pubblico per il voto su alcune Cause di Canonizzazione  (@Vatican Media)

교회, 스페인 내전 순교자 20명 새 복자 선포 예정

레오 14세 교황이 6월 18일 스페인의 이비사 섬과 포르멘테라 섬의 교구 사제 20명의 순교와 관련된 교황청 시성부의 교령 공포를 승인했다. 아울러 교황은 줄리오 에밀리오 알베르토 데 롬바에르데 신부와 클라라 안드레우 이 말페리트 원장 수녀, 마리아 페트라 조르다노 수녀, 마리아 테레사 탤런 원장 수녀, 마리아 아녜세 트리비올리 수녀의 영웅적 덕행을 인정함으로써 이들을 가경자로 선포하게 된다.

Edoardo Giribaldi – Città del Vaticano

 

레오 14세 교황이 6월 18일, 교황청 시성부 장관 마르첼로 세메라로 추기경과 만난 자리에서 1930년대 스페인 내전 중 신앙에 대한 증오로 살해된 이비사 섬과 포르멘테라 섬의 교구 사제 후안 토레스 토레스 신부와 동료 사제 19명의 순교 인정과 관련된 교황청 시성부의 교령 공포를 승인했다. 이로써 이들은 조만간 시복될 예정이다. 아울러, 다음 5명은 영웅적 덕행을 인정받아 가경자에 오르게 됐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걸쳐 마요르카 섬에서 활동한 수도자인 클라라 안드레우 이 말페리트 원장 수녀; 여러 수도회를 창립한 줄리오 에밀리오 알베르토 데 롬바에르데 신부; 토스카나주 비비에나의 산타 마리아 델 사소 수도원 소속 도미니코회 봉쇄 수녀인 마리아 페트라 조르다노 수녀;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의 본당 방문 수도회 창립자인 마리아 테레사 탤런 원장 수녀; 성 요셉의 경건한 노동자 수도회 창립자인 마리아 아녜세 트리비올리 원장 수녀 등이다.

Concistoro Ordinario pubblico
Concistoro Ordinario pubblico   (@Vatican Media)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후안 토레스 토레스 신부와 19명의 동료 사제
이들이 순교한 1936년 8월에서 9월 사이는, 이비사 섬 내에서 종교 예배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 날로 심해져 지역 교회가 이미 막대한 고난을 겪고 있던 시기였고, 당시 순교한 사제들은 지역 성직자의 절반에 달하는 수였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교구는 안전상의 이유로 종교 행렬을 중단하게 됐다. 이 같은 신중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긴장은 결국 노골적인 적대 행위로 폭발했다. 1934년 산 카를로스 본당이 신성모독 당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방화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뒤이은 박해는 섬 내에서 가톨릭 정체성을 완전히 뿌리 뽑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급기야 마을 이름에서 성인을 의미하는 접두사 “산(San)”마저 삭제하기에 이르렀다. 이번 시복 청원의 대표 순교자이자 그룹 내에서 가장 나이가 젊었던 후안 토레스 토레스 신부는 겸손하고 아량이 넓은 젊은 사제였다. 그와 동료 19명이 보여준 순교의 기억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지역 교회 안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클라라 원장 수녀와 신비 체험
또 다른 스페인의 섬 마요르카는 클라라 안드레우 이 말페리트 원장 수녀가 살고 숨을 거둔 곳이다. 1596년 12월 4일에 태어난 그녀는 일곱 살 되던 해에 섬 내륙 지방에 위치한 인카의 산 바르톨로메오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세례명이 바르바라 오노프리아였던 그녀는 열두 살에 수도복을 입었고, 열여섯 살을 갓 넘긴 1613년 2월 17일에 첫 서원을 발하였다. 수도원에서 손님 접대와 환자를 돌보는 일에 헌신하던 그녀는 깊은 영성 생활을 발전시켜 나갔으며, 평생에 걸쳐 지속된 특별한 신비 체험을 했다. 이와 관련하여 마요르카 교구장 주교는 한 가르멜회 수도자에게 조사를 일임하였고, 그 결과 클라라 수녀에게 몇 가지 제한 조치가 내려졌다. 수녀는 받은 지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철저히 준수했다. 1628년 6월 16일, 클라라 수녀는 고해 사제에게 자신의 병세가 급속히 악화될 것임을 알리며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고해성사를 청했다. 일주일 후 그녀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 병자성사를 받았다. 클라라 수녀는 특히 자신의 신비 체험으로 인해 조사를 받는 동안 순명의 덕행을 모범적으로 실천했다. 그녀는 모든 상황을 깊은 겸손으로 받아들였으며, 교회 권위의 결정에 전적으로 순종했다. 그녀의 성덕에 대한 명성은 오늘날까지 산 바르톨로메오 수도원을 순례지로 만들었다.

마리아 페트라 수녀와 수련자 교육
1912년 7월 4일 나폴리에서 태어난 마리아 페트라 조르다노 수녀는 폼페이의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깊었고, 바르톨로 롱고의 저술을 가까이하는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 자랐다. 파시즘 정권과의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아버지가 가족을 이끌고 로마로 이주한 후, 마리아 페트라 수녀는 로마의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을 다니며 수도 성소를 깨달았다. 이후 그녀는 토스카나주 비비에나 근처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 사소 도미니코회 봉쇄 수도원에 입회를 요청했다. 이곳에서 그녀는 어린 나이 탓에 교황청의 관면을 받았으나, 이후 수련장으로 임명되었고, 훗날 공동체의 원장직을 맡기도 했다. 마리아 페트라 수녀가 2006년 6월 21일 선종하였기 때문에, 그녀의 시복 청원 과정에서는 생전의 모습을 직접 본 이들의 생생한 ‘목격’(de visu) 증언을 다수 확보할 수 있었다. 수녀는 평생을 오직 복음 말씀에서 영감받으며 모범적으로 살아갔다.

마리아 테레사 원장 수녀와 이주민·병자들을 위한 위로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의 본당 방문 수녀회 창립자인 마리아 테레사 탤런 원장 수녀는 미국 뉴욕주 유티카 인근의 작은 마을 하노버 출신이다. 1867년 5월 6일 아일랜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아주 어린 나이에 이미 어머니에게 온전히 하느님께 속하고 싶다는 열망을 털어놓았다. 가족들의 반대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인디애나주에 있는 성십자가와 노트르담 수녀회에 입회했다. 이후 소임을 받아 파견된 샌프란시스코에서 디프테리아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마리아 테레사 수녀는 환자들을 간호하다가 자신도 감염되고 말았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그녀는 다른 환자들을 끊임없이 찾아가 위로를 건넸다. 병이 완쾌된 후에는 맨해튼의 성 바오로 본당에서 다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바로 그곳에서, 그녀는 1908년 “거리 위의 관상 수도자”로 살아갈 새로운 여성 수도 공동체인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의 본당 방문 수녀회를 창설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깨달았다. 1951년, 84세의 나이에 그녀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수도회를 다스리는 일에서 물러났다. 1954년 2월 10일 심한 낙상 사고로 인해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었고, 한 달 뒤인 3월 10일 죽음에 이르게 됐다. 그녀의 전 생애는 오직 하느님, 그리고 가장 소외된 어린이와 어른들을 교육하는 사명에 집중되어 있었다.

훌리오 에밀리오 알베르토 데 롬바에르데 신부의 선교 사명
벨기에의 베베런-레이에 마을 출신인 줄리오 에밀리오 알베르토 데 롬바에르데 신부는 성가정 선교 수도회 소속 사제였다. 1878년 1월 7일에 태어난 그는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의 딸 수도회와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의 성모 전교 수도회, 그리고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의 성모 수녀회를 세운 창립자이기도 하다. 열일곱 살 무렵, 한 아프리카 주교의 강론을 듣고 선교사가 되겠다는 열망을 키운 그는 아프리카 성모 선교 수도회에 청원자로 입회하면서 그 꿈을 실현했다. 이후 알제리 인근의 메종카레로 떠났던 그는 1910년 벨기에로 돌아와 장상들로부터 와켄 지역에 사도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1912년 9월, 그는 브라질로 건너가 그곳에 정착하여 아마존의 가장 험준한 오지들을 누비며 사목 직무와 학교 교육, 교리 교육에 전념하였다. 1941년 8월 19일, 그는 브라질 시민권을 취득했으며 시민 당국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시민권 수여식에서 브라질에 대한 자신의 깊은 사랑을 전하기도 했다. 그런데 1944년 12월 24일, 바르젬 그란데로 향하던 중 심각한 자동차 사고를 당해 결국 숨을 거두었다. 평생 동안 데 롬바에르데 신부는 기도와 하느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로 다져진, 강인하고 투쟁적인 정신과 강렬한 사도적 열정을 불태우며 살았다.

마리아 아녜세 원장 수녀와 전쟁 한복판에서 피어난 자선
마지막으로, 1879년 4월 20일 피렌체에서 친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한 채 태어난 마리아 아녜세 트리비올리 원장 수녀의 이야기다. 가정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성 요셉 보호소로 보내진 그녀는 그곳에서 성소를 키웠고 마침내 수도 서원을 발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인해 기존 수도 단체를 떠나 성 요셉의 경건한 노동자 수녀회를 새로이 창립하기로 결단했으며, 이 수녀회는 이몰라교구에서 승인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그녀는 수많은 자선 활동을 전개했는데, 특히 유대인 무리를 수도원에 숨겨주었다가 이로 인해 독일군과 격렬하게 대치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녀의 헌신을 인정받아, 선종 후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열방의 의인”이라는 영예 칭호를 받았다. 1958년 처음으로 심장 질환이 나타난 그녀는 6년 후인 1965년 2월 27일 85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마리아 아녜세 수녀는 특히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하고 소박한 삶의 방식에서 영감받아, 자신의 신앙을 수많은 자선 활동으로 온전히 실천해 낸 삶을 살았다.

번역 이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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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6월 2026, 1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