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폰 갈렌 추기경 선종 80주년, “권리를 존중하지 않고는 결코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Stefania Falasca*
“뮌스터에 고폭탄과 소이탄이 투하되었습니다. 대선당이 타격을 입고 주교관도 파괴됐습니다. 비행기들이 도시 상공을 날아다니는 동안, 저는 연기가 자욱한 폐허 속에서 하늘 높이 솟아오른 곳에 서 계신 주교님을 보았습니다. (...) 그분은 유일하게 남은 벽에 매달려 계셨습니다. (...) 기적적으로 살아 남으신 것입니다.”
나중에 저는 폰 갈렌 주교님께 총대리 신부, 신부들, 신자들과 봉쇄 수녀원의 모든 수녀가 세상을 떠났음을 알렸습니다. 또한 마리엔플라츠와 그로이드가세의 잔해 위에 반쯤 불에 타 훼손된 시신들이 쌓여 있는 끔찍한 광경과 (...) 그 잔해를 파헤치며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분하려 애쓰던 이들이 대피소 안에서 질식하고 끓어오르는 듯한 고통 속에 뒤엉켜 있는 여성과 아이들의 소름 끼치는 시신들을 목격했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1946년 3월 22일에 선종한 뮌스터 교구장 복자 클레멘스 아우구스트 폰 갈렌 추기경의 선종 80주년을 맞이하고 있는 가운데 그의 시복시성 재판 문서에는 1943년 연합군이 독일의 도시 베스트팔렌에 감행한 폭격을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바로 그 도시는, 비오 12세 교황의 지지와 격려를 받은 클레멘스 아우구스트 폰 갈렌 주교와 함께 아돌프 히틀러와 혈통 및 인종 숭배에 공개적으로 저항했던 독일의 중심지였다.
실제로 바로 그 대성당에서, 폰 갈렌 주교는 나치즘의 변태적인 범죄와 야만성을 폭로하고 규탄하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는나? 인권 유린 행위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자들과는 어울리고 싶지 않다”고 선언한 이는 누구였는나? 뮌스터의 사자(Leone di Münster)라는 별명을 얻게 해 준 그의 유명한 설교에서, 생존할 가치 없는 생명을 제거하기 위한 나치의 T4(Tiergartenstrasse 4 작전은 나치 독일의 우생학 사상에 따라 행한 장애인 안락사 정책으로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붙여진 조직의 명칭) 프로젝트를 폭로하고 맹렬히 비난한 이는 누구였는가?
그의 대담하고 불굴의 용기는 불과 1년 전 대중적으로 인정받아 ‘뉴욕 타임스’ 지면에 “나치 정권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로 소개될 정도였다. 그리하여 히틀러는 증오에 휩싸여 “마지막 한 푼까지 갚아주겠다”고 맹세하게 했던 그의 유명한 설교는 심지어 영국 ‘왕립 공군’에 의해 베를린 상공에서 뿌려지기까지 했다. 유다인 공동체와 제3제국 시대(1933-1945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이 통제한 전체주의 독재정권)에 폰 갈렌 주교가 했던 설교들은 비오 12세 교황의 격려와 찬사를 받았다. 폰 갈렌 주교의 시성 과정에서 진행된 기록 조사에서 발견되고 완전하게 복원된 그와 파첼리(비오 12세 교황의 세속명) 교황 간의 서신에서 알 수 있듯이, 교황은 그의 행동을 지지하고 나치의 광기에 맞서 싸우려는 공동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1943년 11월 4일, 폰 갈렌 주교가 비오 12세 교황에게 쓴 서한에는 뮌스터 시가 처한 참혹한 상황과 연합군의 폭격 희생자들에 대한 슬픔을 전했다. 시복시성 재판에서 테오도르 홀링 신부는 “주민들의 고통과 더불어 교구 내 200여 개의 성당이 파괴되었으며, 특히 대성당의 파괴는 그를 깊은 슬픔에 빠지게 했으며, 연합군이 왜 고의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히틀러가 이루지 못한 것을 ‘도덕적 폭격’(moral bombing)으로 성취했다. 이 폭격은 윈스턴 처칠이 ”정의로운 공중전”이라는 전략적 개념을 해석한 방식으로, “독일 국민의 도덕적 저항을 체계적으로 약화시켜 사기를 회복시키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1943년 한 해 동안 뮌스터는 49차례의 공습으로 “구원”받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53차례의 공습이 더해졌다. 가장 격렬했던 공습은 1944년 9월 30일과 10월 22일에 있었다. 인구 6만 6,000명의 도시에 총 5,000발의 고폭탄과 20만 발의 소이탄이 투하됐다.
이 도시의 운명은 독일의 수많은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국가를 멸망으로 이끈 불의 고통 속에서 의도적으로 자행된 ‘과도한 치료’ [과도한 폭격]와 뗄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뮌스터는 연합군 폭격사령부가 특별히 주목한 도시들, 즉 최대한 폭격 기법이 적용되어 “불의 폭풍”이라는 특수 효과로 황폐화되었던 포츠담, 뤼베크, 함부르크, 드레스덴 같은 도시들의 명단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들은 ‘도덕적 폭격(moral bombing)’를 기획한 명실상부한 천재 아서 해리스의 자랑거리였으며, 그는 자신이 이룬 ‘정화’와 전멸의 성과를 ‘고모라 작전’이라 명명했다.
독일에 대한 융단폭격의 “전략적 사용”이 심화되자, 영국 성공회 치체스터교구장 조지 벨 주교는 상원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연합군은 하늘에서 적을 공격하는 신처럼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국기에 새겨진 가장 중요한 단어는 ‘권리’입니다. 우리는 법을 수호하는 데 우리의 힘을 쏟아야 합니다. 그리고 법은 적국의 도시를 파괴하는 것, 특히 융단폭격을 반대합니다!” 그는 이어 “나치 살인자들과 그들이 온갖 악행을 저지른 독일 국민을 같은 수준으로 취급하는 것은 야만성을 확산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는 ‘도덕적 폭격’으로 황폐해진 독일에서 폰 갈렌 주교가 연합군 앞에서 감히 밝혔던 것과 같은, 명쾌하고 용감한 발언이었다. 1945년 10월, 폰 갈렌 주교와 벨 주교는 채드윅 준장이 참석한 가운데 군정 사령부에서 만났다. 영국 성공회 대표 자격으로 독일을 방문한 벨 주교는 폰 갈렌 주교가 “열정적인 사목자적 사랑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신자들을 보호하는 데 헌신했으며”, “연합군 진입 이후 자행된 학대, 약탈, 폭력으로 혼란과 야만이 만연한 지금에도, 하느님의 법과 짓밟힌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하기 위해 주저 없이 검은 것은 검다 하고, 흰 것은 희다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며 존경과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1945년 7월 1일, 뮌스터 시민들이 전후 첫 성지순례를 위해 텔그테 성모 성지를 방문했을 때, 폰 갈렌 주교는 연합군 군정이 독일 국민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공개적으로 강력하게 비판했다. 폰 갈렌 주교의 비서였던 하인리히 포르트만 신부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 위대한 옹호자를 만난 신자들은 깊은 위로를 받았지만, 점령군의 지휘관들은 그렇지 못했다. 바렌도르프의 군사령관은 폰 갈렌 주교를 불러 해명하도록 요구하기까지 했다”고 증언했다. 이 만남은 폰 갈렌 주교의 시성 재판 과정에서 페데리코 쥘링 신부의 증언에 기록되어 있다. “잭슨 사령관은 주교에게 그의 발언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습니다. 주교는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점령군으로서 당신들에게도 의무가 있으며, 만약 당신들이 그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치즘의 불의와 야만에 맞서 행동했던 것과 똑같이 행동할 것입니다.’ 그는 특히 자신이 마음에 두고 있던 몇 가지 문제, 곧 점령군이 자행한 민간인에 대한 공격과 폭력, 특히 여성 강간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이러한 폭력 행위를 이야기할 때 주교는 매우 격분하여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통역사에게 ‘내가 한 말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그대로 번역하라’고 말했고, 설교 내용을 조금도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1945년 8월 20일, 폰 갈렌 주교는 비오 12세 교황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점령군이 장악한 새로운 독일 신문들조차도 나치즘의 잘못된 교리에 동조하지 않았고, 오히려 최선을 다해 저항했던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독일 국민에게 이전 권력자들이 저지른 모든 범죄에 대한 집단적 죄책감과 책임을 전가하려는 주장을 끊임없이 게재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어 씁쓸하게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이러한 심리 상태가 강도와 약탈 행위를 용인하고 [...] 독일 국민을 조국에서 무자비하게 추방하는 근거가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저 없이 명쾌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극도로 격앙된 민족주의, 특히 나치즘의 전형적인 인종 숭배가 오늘날 승전국들 사이에서조차 만연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며, 심지어 포츠담에서는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 할당된 영토에서 독일인 전체를 추방하고 서부 지역으로 몰아넣기로 하기까지 했습니다.”
비오 12세 교황에게 보낸 1945년 9월 25일 서한에서는 “점령지의 참혹한 상황”을 자세히 묘사하며, “승전국에 대한 항의를 통해 직접적인 지원을 해 줄 것”을 간청하기도 했다.
1945년 성탄절 전날, ‘바티칸 라디오’는 비오 12세 교황이 클레멘스 아우구스트 폰 갈렌 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고 발표했다.
로마에 도착한 뮌스터의 사자는 승리의 환호를 받았다.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의 학생들은 “민중의 목소리는 하느님의 목소리(vox populi vox Dei)”라는 외침으로 그를 맞이했다. 비오 12세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나치의 광기에 맞서 싸운 다른 두 명의 독일 주교, 쾰른대교구장 요제프 프링스 대주교와 베를린교구장 콘라트 폰 프라이징 주교와 함께 그를 추기경으로 서임했다. 독일 주교단과 독일인에게 있어 이러한 임명은 비오 12세 교황이 당신 “모든 독일인을 범죄자 집단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던” 이들의 목소리에 동조하지 않으며, 동시에 “나치즘에 용감하게 저항했던 이들, 특히 갈렌 주교와 같은 이들에게 정당한 보상의 표시였고, 그중에서도 으뜸의 자리는 폰 갈렌 주교의 것이었다.” 따라서 언론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곧 폰 갈렌 주교는 감히 공개적이며 정면으로 정권을 공격했으며, 그가 히틀러에 저항했던 또 다른 독일의 상징이 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비오 12세 교황이 ‘그를’ 추기경으로 서임한 것은 “집단적 죄책감의 거부”와 “전체주의 국가에서 근절되어야 했던 그리스도교 진리와 인간의 불가침 권리를 용감하게 옹호한 인물에 대한 감사”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1946년 1월 6일, 폰 갈렌 주교는 추기경으로 서임되기 위해 로마로 떠나기 전 비오 12세 교황에게 마지막 서한을 보냈다. 그날 그는 텔그테 성지에서 주님 공현 대축일 미사를 봉헌했다. 그는 성지에서 한 마지막 강론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나치즘 치하에서 저는 공개적으로 선언했고, 1939년 히틀러의 팽창주의적 야망을 저지하기 위해 어떤 세력도 개입하지 않았을 때, 그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의는 국가의 근간입니다. 정의가 재확립되지 않는다면, 우리 민족은 내적인 부패로 죽어갈 것입니다.’ 오늘날 저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만약 민족 간에 권리가 존중되지 않는다면, 그들 간의 평화와 화합은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 시복시성 청원인
번역 이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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