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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22 Padre Augusto Rafael Ramírez Monasterio e Suor Maria Ignazia Isacchi 2026.01.22 Padre Augusto Rafael Ramírez Monasterio e Suor Maria Ignazia Isacchi 

2명의 새 복자와 4명의 가경자 탄생

레오 14세 교황이 1월 22일 과테말라 출신의 작은 형제회 소속 아우구스토 라파엘 라미레스 모나스테리오 수사의 순교와 이탈리아 출신으로 아솔라의 예수 성심 우르술라 수녀회 설립자 마리아 이냐치아 이사키 수녀의 전구로 일어난 기적을 인정하여 복자품에 올리는 교령 공포를 승인했다. 아울러 1월 22일부터 3명의 수도자와 1명의 평신도가 영웅적 덕행을 인정받아 가경자로 공포됐다.

Tiziana Campisi

 

레오 14세 교황이 1월 22일 교황청 시성부 장관 마르첼로 세메라로 추기경의 예방을 받고 작은 형제회 소속 아우구스토 라파엘 라미레스 모나스테리오 신부의 순교와 아솔라의 예수 성심 우르술라 수녀회 설립자 안젤라 카테리나 이사키 수녀의 전구로 일어난 기적을 인정하여 복자품에 올리는 교령 공포를 승인했다. 아울러 △평신도 네리노 코비안키 △세례자 성 요한 수녀회 소속 크로치피사 밀리테르니 수녀 △포우소 알레그레의 성가정의 카르멜 수녀회 설립자 마리아 지셀다 빌렐라 수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의 경건한 일꾼 수녀회의 공동 설립자 마리아 테클라 안토니아 렐루첸티 수녀의 영웅적 덕행을 인정하여 가경자로 공포했다.

아우구스토 라파엘 라미레스 모나스테리오 신부
아우구스토 라파엘 라미레스 모나스테리오 신부는 1937년 11월 5일 과테말라시의 대가족이며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과테말라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후, 니카라과 디리암바에 있는 작은 형제회 세라피코 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수도 성소를 느낀 그는 프란치스코회 스페인 후미야 공동체에서 수련기를 시작했으며, 철학과 신학 공부를 마친 후, 1967년 6월 18일 사제로 서품됐다. 니카라과로 돌아온 그는 디리암바의 세라피코 학교에서 양성 책임자로 재직하다가 스페인으로 돌아가 살라망카에서 대학 과정을 마쳤다. 1978년 과테말라 안티과에 있는 산 프란시스코 엘 그란데 성당의 주임 신부로 부임하여, 과테말라 내전으로 고통받던 시기에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사목 활동을 펼쳤다. 1964년 과테말라에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좌익 무장 단체들을 조직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는 강압적인 조치를 정당화하고 시민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구실로 이용됐다. 복음의 메시지에 따라 이루어지는 가톨릭 교회의 사목 활동과 사제, 수도자들의 인류 발전과 권리 수호에 대한 헌신은 마르크스주의 이념과 결탁한 것으로 간주되어 위험하고 두려운 존재로 여겨졌다. 많은 사제들은 가난한 이들의 부당한 처지를 대변했고, 이로 인해 군부를 지원하는 대지주와 다국적 기업들의 이익과 갈등을 빚게 됐다. 아우구스토 라파엘 신부는 무장 게릴라에 가담했다가 정부의 사면을 통해 명예를 회복하려던 한 농부를 도왔다는 이유로 1983년 6월 2일 체포됐다. 그는 고문을 당한 후 풀려났지만, 특별 감시를 받으며 수많은 살해 협박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는 가난한 이들과 불의에 고통받는 모든 이를 옹호하도록 이끌었던 복음적 가치에 충실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들은 것을 보고하라며 폭력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고해성사의 비밀을 지키는 데 충실했다. 11월 7일 그는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다시 고문을 당했다. 특수 경찰차에 실려 도시 외곽으로 이송되던 중 탈출을 시도했으나 군인들에게 붙잡혀 목숨을 잃었다. 그의 살해 동기는 신앙에 대한 증오로 판단된다.

​​마리아 이냐치아 이사키
세속명이 안젤라 카테리나이며 안칠라로 알려진 마리아 이냐치아 이사키 수녀도 시복될 예정이다. 1857년 5월 8일 베르가모 스테차노에서 태어난 그녀는 20대 초반에 수도 생활을 선택했다. 소마스카의 우르술라 수녀원에 입회하여 마리아 이냐치아라는 수도명을 받은 그녀는 여러 직책을 맡아 수행했다. 1893년 크레모나 교구장 제레미아 보노멜리 주교는 그녀에게 가추올로에 위치한 새로운 수도회인 예수 성심 우르술라 수녀회를 설립한 수녀들을 양성해 줄 것을 요청했다. 총장으로 선출된 그녀는 본원을 아솔라로 옮겨 1924년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할 때까지 수녀회를 이끌었다. 그녀는 “종신 명예 총장”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1934년 8월 19일 세리아테에서 선종했으며, 2022년 가경자로 선포됐다. 그녀의 시복과 관련하여 1950년, “결핵성으로 추정되는 장염”으로 인해 극심한 복통에 시달리던 예수 성심 우르술라 수녀회 소속 마리아 아순타 차펠라 수녀가 그녀의 중재로 기적적으로 치유됐다. 마리아 아순타 수녀는 처방된 치료가 효과가 없자 입원했지만, 상태는 더욱 악화됐다. 이에 그녀를 돌보던 동료 수녀가 마리아 아순타 수녀에게 1943년 마리아 이냐치아 수녀가 작성한 기도문을 바치며 그녀에게 쾌유를 간구하는 9일 기도를 시작해 보라고 권했다. 9일 기도 마지막 날, 마리아 아순타 수녀는 몸이 갑자기 호전되어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을 청했다. 다음 날 흉부 엑스레이 검사 결과 병세가 호전된 것으로 나타났고, 담당 의사들은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호전과 빠른 회복세를 보인 후 며칠 만에 완전히 회복됐음을 확인했다. 1995년 교구 조사 당시 마리아 아순타 수녀는 두 명의 의학 전문가의 진찰을 받았고, 전문가들은 그녀의 완치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마리아 아순타 수녀는 2018년 9월 7일, 1950년 앓았던 질병과는 전혀 무관한 원인으로 선종했다.

네리노 코비안키
오늘부터 가경자가 된 네리노 코비안키는 파비아의 벨레초 로멜리나에서 1945년 6월 25일에 독실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학업을 마친 후 밀라노의 한 은행에 취직했다. 그라치엘라 비툴로와 결혼하여 두 자녀를 뒀다. 1974년 가족과 함께 칠라베냐로 이주한 그는 본당 공동체에 들어가 사목평의회 위원이 됐다. 그는 청소년 사목에 헌신하며 스카우트 단체 창립에도 참여했다. 또한 성령 쇄신 운동에 참여하여 본당 내에 기도 모임을 만들었다. 1980년 이르피니아 지진 당시에는 자원하여 주민 구호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직장에서 그리스도인 직원들로 구성된 기도 모임과 비신자들로 구성된 또 다른 모임을 조직했다. 그 외에도 지역 사회와 세계 여러 소외된 지역의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본당 카리타스에 “프란체스코 피안촐라 신부 지원 그룹”을 설립했다. 그는 “피안촐라 올리벨리 협회”를 설립하여 청년, 노동자, 기업가들을 자선 활동에 참여시켰다. 또한 성매매 소녀들을 위한 보호소를 설립하고, 그곳에 구호 물품을 제공하는 연대 창고를 마련하여 여성들에게 물질적 지원을 제공하고 이탈리아어를 가르쳤다. 네리노는 앙골라의 알렉상드르 두 나스시멘토 추기경과 쌓은 형제애에 힘입어 앙골라 주민들을 지원하기 위한 모금 활동을 벌였으며, 자선 활동을 사헬 지역의 다른 국가들로까지 확대했다. 1996년 10월, 그는 췌장암 진단을 받았지만, 1998년 1월 3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헌신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삶은 굳건한 신앙에 뿌리를 두고 기도, 매일 미사 참례, 성경 읽기, 묵주기도를 통해 더욱 풍성해진 열정적인 자선 활동으로 가득했다. 네리노는 그리스도교적 희망을 온전히 삶에 적용하여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일상생활을 자신과 타인을 성화하는 장소이자 수단으로 변화시켰다. 그는 자상한 남편이자 아버지였으며,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고 이웃과 연대하도록 이끌었다. 그의 성덕의 명성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그의 무덤은 순례지가 됐다.

크로치피사 밀리테르니
크로치피사 밀리테르니(세속명 테레사)는 1874년 12월 24일 칼라브리아주 체트라로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기도 생활과 젊은이들을 위한 사도직 활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녀는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1894년 3월 개인적으로 순결 서원을 했다. 몇 년 후, 그녀는 성 알폰소 마리아 푸스코 신부가 설립한 세례자 성 요한 수녀회 소속 수녀들과 함께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이 수녀회는 1902년 3월 19일 체트라로에 수녀원을 열었다. 이듬해 테레사는 수녀회에 지원자로 입회하여 크로치피사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녀는 가난한 젊은 여성들을 돌보는 데 헌신하기 시작했고, 가장 가난한 이들의 아이들을 받아들이고, 기초 교육을 제공하기 위한 “프린치페사 마팔다” 유치원 설립에 기여했다. 또한, 그녀는 체트라로에 수도원 건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는데, 그때까지 수녀들은 후원자들이 제공한 건물에 거주하고 있었다. 1915년, 크로치피사 수녀는 수련장으로 발령을 받아 로마로 갔고, 10년 후 심각한 건강 문제로 인해 체트라로로 돌아와 1925년 3월 25일 선종했다. 그녀의 삶은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사도적 활동이 돋보이며, 탁월한 식별력으로 수많은 수도 성소를 꽃피웠다. 크로치피사 수녀는 진정한 신앙을 기르는 데 있어 기도의 중요성을 늘 강조했으며, 병든 이를 돌보고, 가난한 이, 노인, 임종을 앞둔 이들을 돕는 데 헌신했다. 겸손하고, 사랑이 넘치며, 물질적인 것에 초연한 그녀는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건강 문제로 인한 극심한 고통을 평온하게 견뎌냈다.

마리아 지셀다 빌레라
새로운 가경자 중 한 명인 마리아 지셀다 빌레라는 1909년 1월 12일 브라질의 마리아다페에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질병으로 얼룩진 삶을 살았다. 14세 때 의사들이 거의 희망이 없다고 했던 사타구니 암을 이겨냈다. 질병으로 인한 육체적 쇠약과 종양의 재발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930년 11월 29일 상파울루주 캄피나스에 있는 산타 테레사 가르멜 수도원에 입회하여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마리아 임마콜라타라는 수도명으로 수도복을 받았다. 1942년, 마리아 지셀다 수녀는 포우소 알레그레의 수도원 설립 구성원이 되었고, 수도원이 설립된 후 원장 수녀가 됐다. 세 명의 공동 설립자가 포우소 알레그레 수도원을 떠나 본원으로 돌아가면서 그녀는 홀로 열정적이지만 경험이 부족한 수련 수녀들을 이끌어야 하는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그녀의 헌신 덕분에 1957년 새로운 가르멜 수도원이 설립됐고, 이곳에서 그녀는 조언과 기도를 구하는 많은 이에게 영적인 버팀목이 됐다. 그녀는 따뜻하고 친절하며 자애로운 성품 덕분에 “마에지냐”(Mãezinha, 엄마)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간 동안 평신도들도 참여할 수 있는 기도회를 조직하고 공의회의 수도 생활 쇄신에 관한 교령을 이행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수녀회 회칙을 개정했다. 마리아 지셀다 수녀는 항상 수도회 총장과의 일치 정신을 유지하며 브라질의 다른 가르멜 수도원의 수녀들과 협력했고, 1985년에는 수도회 관구장과 캄포스 교구장의 초청에 응해 당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분열로 인해 혼란에 빠진 캄포스 교구에 수도원을 설립했다. 마리아 지셀다 수녀는 1988년 1월 20일 포우소 알레그레의 수도원에서 새로 발병한 암으로 선종했다. 깊은 신앙심으로 충만한 마리아 지셀다 빌레라 수녀는 언제나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보였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모든 이에게 헌신했다. 봉쇄 수도원에 살면서도 그녀는 세상에 마음을 열고, 위로나 조언을 구하고자 수도원 면회실 문을 두드리는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생전에 이미 널리 알려진 그녀의 성덕의 명성은 선종 후, 특히 포우소 알레그레 지역에 더욱 널리 퍼졌다.

마리아 테클라 안토니아 렐루첸티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의 경건한 일꾼 수녀회의 공동 설립자인 마리아 테클라 안토니아 렐루첸티 수녀는 1704년 9월 23일 아스콜리 피체노에서 부유하고 독실한 가정의 다섯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녀의 두 남동생은 각각 교구 사제와 도미니코 수도회의 수도자가 됐다. 자신보다 열세 살 어린 프란체스코 안토니오 마르쿠치와의 만남은 마리아 테클라의 삶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됐다. 그녀는 1741년 마르쿠치가 사제 서품을 받을 때까지 그의 영적 성장을 도왔다. 수녀회를 설립하려는 열망을 품고 있던 마르쿠치 신부는 1744년 아스콜리 피체노 교구장으로부터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의 경건한 일꾼 수녀회 설립 허가를 받았다. 마리아 테클라는 이 계획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1744년 12월 8일 설립자로부터 수녀회의 종신 원장으로 임명받았다. 공동체 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아스콜리 피체노에 최초의 무료 여학교인 “스쿠올라 피아”(Scuola Pia)를 설립하는 데 헌신했다. 마리아 테클라 수녀는 기도와 참회 외에도 동료 수녀들과 함께 도시의 젊은 여성들에게 주일 교리를 가르치는 데 헌신했다. 또한 1747년, 프란체스코 안토니오 마르쿠치 신부와 함께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운영했다. 이 아카데미는 수녀들과 각계 각층 여성들의 문화적, 종교적, 인간적 발전을 증진하기 위해 설립됐다. 마리아 테클라 수녀는 1752년에 수녀회 회칙 초안 작성에 참여했고, 1769년 7월 11일에 선종했다. 마리아 테클라 수녀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범적인 삶은 그녀의 영성 지도 신부였던 프란체스코 안토니오 마르쿠치 신부의 저술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굳건한 신앙을 바탕으로 그녀는 가족의 어려움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의 경건한 일꾼 수녀회 설립 과정에서 발생한 수많은 난관에 굳건히 맞섰다. 그녀의 자비로운 마음은 수녀들의 영적 성장과 젊은 여성들의 그리스도교 교육에 대한 헌신에서 잘 드러났다. 마리아 테클라 수녀는 부유한 가정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을 받아들이고, 동료 수녀들에게 수도회 공동체를 위해 부지런히 일하도록 가르쳤다. 수녀회 설립자인 프란체스코 안토니오 마르쿠치 신부의 시복 절차가 먼저 진행됐기 때문에 마리아 테클라 수녀의 시복 절차는 사후 250년 만에 시작됐으며 2026년 1월 22일 가경자로 선포됐다.

 

번역 이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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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1월 2026, 1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