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17 Vangelo di domenica 2019.02.17 Vangelo di domenica 

성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 5월 3일

「주님의 산상수훈에 대하여」(De sermone Domini in monte) 제2권 67-70:

 

67. 주님의 계명을 따르려는 어떤 이들에게는 “단순함”이라는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때로는 진리를 숨기는 것도 잘못이며, 거짓을 말하는 것도 잘못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침묵하는 것보다 더 큰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주 시의적절하게 다음과 같이 덧붙이셨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주님께서는 결코 거짓을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때로는 진리를 숨기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요한 16,12)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사도 바오로 또한 “, 나는 여러분을 영적이 아니라 육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젖만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1코린 3,1-2 참조)라고 하셨습니다.

68.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는 이 명령에서, 우리는 무엇이 ‘거룩한 것’이고 ‘진주’이며 ‘개’와 ‘돼지’인지 깊이 숙고해야 합니다. '거룩한 것'은 훼손하거나 부패시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진주'는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가 비유의 베일을 벗길 때 비로소 드러나는 모든 영적 실재들을 뜻합니다. ‘거룩한 것’은 모독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고, ‘진주’는 경시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개들은 진리를 부수고 찢으려 달려드는 이들이며, 돼지들은 비록 물어뜯지는 않으나 발로 짓밟아 더럽히는 이들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마라.” 비록 진리 자체는 결코 찢기거나 훼손되지 않고 온전하며 침해될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은 완고한 반대로 진리를 무너뜨리려 애쓰는 자들입니다. 반면 ‘돼지’는 진리를 하찮게 여기고 짓밟는 자들을 뜻합니다.

69. 주님께서는 “그것들이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라고 하셨지, 진주를 물어뜯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진주를 발로 짓밟고는, 정작 그것을 던져준 사람을 분노와 혐오로 물어뜯습니다. 거룩한 것을 짓밟는 자들에게 무엇인들 기쁨이 되겠습니까? 그들을 가르치는 자는 결국 그들의 혐오와 경멸에 시달리게 될 뿐입니다. 개와 돼지는 모두 부정한 동물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이해할 능력이 없는 자에게 무분별하게 진리를 드러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진리가 열렸을 때 더럽히거나 경멸하게 두는 것보다, 그가 스스로 닫힌 문을 두드려 찾게 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이토록 위대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미움과 경멸을 품게 되는 근본 원인은 세상 사물에 대한 집착, 즉 세상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단순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에게 침묵했다고 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거짓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으나, 진리를 숨기는 것이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먼저 상대방의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가 내면의 불결함 때문에 이해하지 못한다면, 가능한 한 말과 행동으로 먼저 그를 깨끗이 씻어준 후에 진리를 전하도록 하십시오.

70. 우리 주님께서 현존해 있던 많은 이들이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거부하거나 멸시한 어떤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그분께서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시고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셨다고 믿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이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 부정한 이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무시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혹하는 자들이 질문을 던질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이 감히 반박할 수 없도록 대답하셨습니다. 그들이 비록 주님의 생명의 양식으로 배불려지기보다는 자신들의 독기에 의해 스스로 무너졌을지언정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 곧 이해할 수 있었던 이들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많은 것을 유익하게 경청하였습니다. 제가 이 점을 언급하는 이유는, 혹여 누군가가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할 때 이 구절을 핑계 삼아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거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무지를 정당화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대답할 줄 아는 사람은 마땅히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질문자가 제기한 문제가 도저히 해결될 수 없다고 믿어 불신에 빠질 수도 있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이는 구원의 교리에 속하는 유익한 일들에 해당합니다. 물론 게으른 자들이 묻는 사소하고 무익하며 때로는 해롭기까지 한 수많은 질문에 대해서도 적어도 뭔가는 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말해져야 할 것은, 왜 이러한 것들을 묻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지를 설명하는 일일 것입니다. 유익한 것들에 관해서는, 때때로 우리가 질문받은 바에 대하여 대답하는 것이 의무일 것입니다. 이는 사두가이들이 일곱 남편을 두었던 여인에 대하여 질문했을 때 주님께서 하신 것과 같을 것입니다. 곧 장차 부활 때 그 여인이 일곱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지를 물었을 때입니다. 그분께서는 부활 때에는 남자도 아내를 맞이하지 않고 여자도 남편을 맞이하지 않으며, 하늘의 천사들과 같이 될 것이라고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질문하는 자가 스스로 다른 것에 관하여 질문을 받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만일 그가 말한다면, 그는 자신이 물었던 것에 대해 스스로에게 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지 않는다면, 그가 물은 것에 대하여 대답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참석한 이들에게 부당하게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그분을 시험하기 위하여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라고 질문했던 자들도, 그들이 내놓은 화폐에 새겨진 형상이 누구의 것인지에 관하여 다시 질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질문받은 바에 대하여, 곧 그들의 화폐에 황제의 형상이 있다고 대답하였을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주님께 드린 질문에 스스로 답한 셈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대답으로부터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마태 22,21)라고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수들이 주님께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물었을 때도, 주님께서는 요한의 세례에 대해 되물으셨습니다. 그들은 진실을 말하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렇다고 요한에 대해 함부로 나쁜 말을 할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도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마태 21,27)라고 말씀하셨고, 이는 곁에 있던 모든 이에게 지극히 정의로운 태도로 비춰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모른다고 거짓을 말하며 대답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자신들이 물은 것에 대하여 대답을 듣고자 했던 이들은, 먼저 자신들이 요구한 바를 스스로 행했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했더라면, 그들은 스스로에게 답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요한이 누구인지 알기 위하여 사람들을 보낸 바 있었으며, 더 나아가 그들 자신, 곧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바로 그 파견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요한이 그리스도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요한은 이를 부인하고 오히려 주님에 대하여 증언하였습니다. 그들이 만약 요한의 그 고백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면, 그리스도께서 무슨 권한으로 그 일들을 하시는지 이미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주님을 함정에 빠뜨려 비방할 기회만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번역 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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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5월 2026, 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