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17 Vangelo di domenica 2019.02.17 Vangelo di domenica 

성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 4월 13일

「주님의 산상수훈에 대하여」(De sermone Domini in monte) 제2권 59-63:

59. 또한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미래를 위하여 마련하거나, 아직 사용할 이유가 없어서 보관해 둘 때, 그것을 어떤 마음으로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는 순수한 마음으로도 할 수 있고, 이중적인 마음으로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아주 적절하게 다음과 같이 덧붙이셨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 7,1-2).

제 생각에 이 구절은, 어떤 행동이 어떤 마음에서 비롯되었는지 불분명할 때 그것을 가급적 선하게 해석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들의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 것이다”라는 말씀은 간음, 모독, 도둑질, 만취처럼 누군가 봐도 명백히 악한 마음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행위들에 적용되는 것이며, 우리는 그런 일들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께서도 “바깥 사람들을 심판하는 것은 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심판할 사람들은 안에 있는 이들이 아닙니까?”(1코린 5,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음식의 종류에 관해서라면 다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절제를 지키며 먹는다면 어떤 음식이든 상관없기에, 사도께서는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이들을 절제하는 이들이 함부로 판단하지 못하게 금하셨습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은 가려 먹는 사람을 업신여겨서는 안 되고, 가려 먹는 사람은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을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 또 같은 곳에서 “그대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심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 넘어지든 그것은 그 주인의 소관입니다”(로마 14,3-4)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선하고 단순하며 너그러운 마음으로 행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마음으로도 행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하여, 일부 사람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 속한 것까지 판단하려고 하였으나, 그러한 것은 오직 하느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60. 이와 관련하여 다른 곳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1코린 4,5).

이처럼 우리는 어떤 행위들이 선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는지 악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이른바 “중간적인” 행위들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판단하거나, 더 나아가 정죄하는 것은 경솔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때가 되면 심판받게 될 것이니, 곧 주님께서 숨겨진 어둠을 밝히시고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실 때입니다.

사도는 또 다른 곳에서 “어떤 사람들의 죄는 명백하여 재판 전에 드러나고, 어떤 이들의 죄는 재판 때에야 드러납니다”(1티모 5,24)고 말합니다. 명백한 행위들은 어떤 마음에서 비롯되었는지가 분명하므로 심판에 앞서 드러납니다. 반면 숨겨진 죄들은 나중에 드러나게 됩니다. 때가 되면 그것들도 드러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치는 선한 행위들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입니다. 그는 이어서 “마찬가지로 선행 역시 명백한 것으로서,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언제까지나 숨겨져 있을 수는 없습니다”(1티모 5,25)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드러난 것들에 대하여 판단하고, 숨겨진 것들에 대해서는 하느님께 맡겨야 할 것입니다. 그것들이 선하든 악하든 간에, 드러날 때가 되면 결코 숨겨져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61. 우리는 두 가지 경우에 경솔한 판단을 내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첫째는 어떤 마음으로 그 일을 했는지 알 수 없을 때이고, 둘째는 지금은 선하거나 악해 보이는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을 때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신의 위장 문제를 호소하면서도 단식을 하지 않으려 할 때, 그것을 탐식 때문이라고 단정한다면 이는 경솔한 판단이 될 것입니다. 또한 분명한 탐식과 음주를 보고 그 사람이 결코 고쳐지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한다면, 그것 역시 경솔한 판단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마음으로 행했는지 모르는 일들을 비난하지 말 것이며, 명백히 드러난 잘못이라 해도 그 사람이 언젠가 선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고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할 때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라는 말씀에 어긋나는 일을 피하게 될 것입니다.

62. 그러나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다소 어려움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경솔하게 판단하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경솔하게 판단하신다는 뜻이겠습니까? 혹은 우리가 부당한 기준으로 판단하면, 하느님께서도 부당한 기준으로 우리를 판단하신다는 뜻이겠습니까? 여기서 “되”라는 말은 판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결코 경솔하게 판단하시거나 부당한 기준으로 갚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 말씀은 오히려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곧,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그 경솔함이 바로 그 사람 자신을 벌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혹시 어떤 이는 불의가 그것을 당하는 사람에게만 해를 끼치고, 그것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오히려 대개 그 반대입니다! 불의는 그것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해를 끼칩니다. 박해자들의 불의가 순교자들에게 무슨 해를 끼쳤겠습니까? 오히려 그것은 박해자들 자신에게 큰 해가 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회개하였지만, 박해하던 당시에는 그들의 악으로 눈이 멀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경솔한 판단은 대부분 판단받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판단하는 사람 자신에게 해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 그 경솔함 자체가 그에게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동일한 법칙이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마태 26,52)라는 말씀에도 드러난다고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이들이 칼로 남을 해치지만 칼로 죽지 않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사도 베드로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죄의 용서를 받았다고 해서 이 원칙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칼로 죽는 것보다 십자가로 죽는 것이 더 가벼운 형벌이라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또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은 용서를 받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살인자들이 동일한 형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라는 말씀은, 사람이 어떤 죄를 짓든지 그 죄 자체로 말미암아 영혼이 죽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63.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부당하고 경솔한 판단에 대하여 경고하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을 단순한 마음과 오직 하느님을 향한 마음으로 행하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많은 행위들이 어떤 의도로 이루어졌는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을 판단하는 것은 경솔한 일이 될 것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을 고치고 바로잡기보다 비난하고 정죄하기를 더 좋아하는 이들이, 경솔하게 판단하고 쉽게 정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교만과 시기의 악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3)라고 하십니다.
이는 만약 누군가 분노 때문에 죄를 지었는데 당신이 그를 '미움'으로 책망한다면, 티와 들보의 차이만큼이나 분노와 미움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미움은 오래 묵은 분노와 같아서 세월이 흐르며 뿌리가 깊어져 '들보'라 불릴 만큼 강력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고쳐주려는 선한 의도로 화를 낼 수는 있겠지만,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그를 고쳐주려는 진심 어린 의지를 가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번역 박수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용시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고, 임의 편집/변형하지 마십시오)

 

12 4월 2026, 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