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 3월 23일
25. 네 번째 청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일용할 양식’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마라”고 명하셨기에 “오늘”이라는 말이 덧붙여진 것입니다. 혹은 우리가 매일 모시는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성사)를 가리키거나, 주님께서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을 얻으라)”(요한 6,27) 하시고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다”(요한 6,41)라고 하신 영적인 양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제 이 세 가지 해석 중 어느 것이 가장 타당한지 살펴봅시다. 어쩌면 누군가는 우리가 음식과 옷 같은 현세의 필수적인 것들을 청하면서도, 정작 주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마태 6,31)고 말씀하신 점 때문에 혼란스러울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하고 있는 바로 그 일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요? 더구나 우리는 하느님께 온 마음의 열정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권고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을 닫고 기도하라는 말씀이나,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도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그다음에’ 이것들을 구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 모든 것은 ‘덤으로’ 주실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곧 이것들을 따로 구하지 않더라도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주시기를 그토록 간절히 기도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찾지(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어떻게 올바른 해석이 될 수 있을지, 이것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6. 성체성사(주님의 몸)에 관하여 말하자면, 주님의 만찬에서 매일 성체를 모시지 않는 동방 지역의 많은 분은 이 양식이 '일용할(매일의)' 것이라고 불리는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침묵해야 하며, 심지어 교회의 권위까지 끌어들여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곧 그들이 그렇게 행하면서도 아무에게도 스캔들을 주지 않고 있으며, 교회를 맡아 다스리는 이들도 그것을 금지하지 않았고, 또한 매일 성체를 영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것이 성체를 뜻했다면, 매일 성체를 모시지 않는 이들은 중죄로 단죄받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분들의 사정은 제쳐두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기도의 규범을 받았으며, 그 규범에 무언가를 보태거나 빼서 어겨서는 안 된다는 점을 떠올릴 것입니다. 상황이 그러하다면, 누가 감히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하루에 단 한 번만 바쳐야 한다거나, 혹은 두세 번 바치더라도 성체를 모시는 시간까지만 바치고 그날의 나머지 시간에는 바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이미 그것을 받았으니 더 이상 “오늘 저희에게 주소서”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사람은 그 성사가 하루의 마지막 시간에 거행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27.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은 영적인 양식, 즉 매일 묵상하고 실천해야 할 하느님의 계명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양식에 대해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마라”(요한 6,27)고 말씀하셨습니다. 해가 저물고 날들이 이어지는 이 덧없는 현세의 삶이 계속되는 동안, 이 양식은 '일용할' 것이라 불립니다. 실제로 우리의 마음이 때로는 높은 영적 실재로 고양되었다가도, 때로는 낮은 육적인 것들로 내려앉기를 반복하는 동안(마치 포만감에서 배고픔으로 넘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 양식은 매일 필요합니다. 그래야 배고픈 이가 배부르게 되고, 죄로 인해 기진한 이가 다시 일어설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이 이 생명에서 (부활의) 변화를 맞이하기 전까지는 기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기에 음식으로 기운을 차리는 것처럼, 마음 또한 세상의 정욕으로 인해 하느님의 계획에서 멀어지는 손해를 입기에 계명이라는 양식으로 기운을 차려야 합니다.
“저희에게 주소서”라는 간구는 '오늘'이라고 불리는 시간, 곧 이 현세의 삶 동안 계속됩니다. 이 삶이 지나면 우리는 이 영적인 양식으로 영원히 배불리 먹게 될 것이며, 그때는 더 이상 '일용할 양식'이라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곳에는 하루가 지나가고 다음 날이 오는 시간의 변덕이 없기에 '매일'이라는 말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편에서 “오늘 너희가 그분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면”(시편 94,8 참조)이라고 한 것을 사도께서 히브리서에서 “‘오늘’이라고 불리는 동안 내내”(히브 3,11 참조)라고 해석하셨듯이, 여기서의 “오늘 저희에게 주소서” 또한 같은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누군가 이 표현을 몸에 필요한 음식이나 주님의 몸의 성사에까지도 적용하고자 한다면, 세 가지 해석을 함께 받아들여야 합니다. 곧 우리가 육신에 필요한 빵, 축성된 눈에 보이는 빵,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말씀의 빵을 함께 청하고 있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번역 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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