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ercizi spirituali di Quaresima per Papa Leone Esercizi spirituali di Quaresima per Papa Leone  (ANSA)

사순시기 연례피정, “그리스도 안에서 그 어떤 절망도 끝이 아님을 전합니다”

오늘 2월 27일 오후, 파올리나 경당에서 레오 14세 교황과 교황청 장관들을 위한 사순시기 연례피정의 열한 번째이자 마지막 묵상이 열렸다. 강론을 맡은 바르덴 주교는 ‘희망을 전함'이라는 주제로 깊은 성찰을 나누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덕분에 세상의 상처들이 "치유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치유의 근원이 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오히려 아픈 부위인 '병든 지체'를 제거해 버리려는 오늘날 세상의 경향과는 대조되는 희망의 메시지다.

Vatican News

희망을 전하며
2026년 2월 27일
사순시기 연례피정 열한 번째이자 마지막 강론
오, 선하심이여(O BONITAS)

다음은 바르덴 주교 자신이 요약하여 제시한 묵상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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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0월 11일, 교황 요한 23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장엄한 개막을 선포하셨습니다. 교황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공의회가 무엇보다 관심을 두는 것은 그리스도교 교리의 거룩한 유산(sacro deposito)을 더욱 효과적인 형태로 보전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교리는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진 온전한 인간을 포용하며,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 나그네로서 하늘 고향을 향해 나아가라고 명합니다."

교황님의 연설이 있은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했습니다. 인류는 종말론적 지평에 대한 고려 없이 지상에서의 존재 자체를 끝내버리기로 결심한 듯 보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 인류는 스스로를 파멸시킬 새롭고도 무시무시한 전망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공의회는 이처럼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열렸습니다. 동시에 이 시기는 인권과 공정 무역, 기술 발전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렬한 희망으로 가득 찬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공의회는 "세계의 현행 진화에 관한 불안한 질문들, 우주 안에서 인간의 위치와 임무, 개인적·집단적 노력의 의미, 그리고 사물과 인간의 최종 운명"에 대해 말하고자 했습니다. 공의회는 단순히 문제들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미래를 구현하신다고 선포하며 해결책을 제시하였습니다. 공의회는 교리의 거룩한 유산에 조금도 훼손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가 이 시대의 가장 절박한 질문들에 대한 명확하고 설득력 있는 해답으로 드러나도록 그분을 선포할 과업을 교회에 맡겼습니다.

공의회가 폐막한 지 60년이 흐른 지금, 이 유산의 힘과 효과에 대한 신뢰가 언제 어디서나 유지되어 왔는지 자문해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세대는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 신자들에게 묘사한 두 모습 사이에서 스스로를 성찰해야 합니다. 하나는 신앙과 지식의 일치 안에서 성숙한 인간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함'에 이르는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온갖 교리의 풍조에 흔들리고 속임수와 교활한 책략, 혹은 값싼 낙관주의에 빠져 갈팡질팡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세상에 희망을 전하는 이들로 부르십니다. 그리스도교적 희망을 품는다는 것이 반드시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막연한 소망을 버리고 결연히 현실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선동가들은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약속하며, 한 번의 임기 동안 공동체를 바꿀 수 있는 전능한 힘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빵과 구경거리, 상대방에 대한 비방으로 대중의 관심을 돌리며 실망감을 감춥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얼마나 다릅니까. 주님께서는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날 것"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 박해가 올 것이고, 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선언에는 체념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인 우리에게 사랑과 정의로 빚어진 새롭고 건강한 인류를 위해 끊임없이 일할 것을 명하십니다. 우리에게 "병자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세우며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 주어라"고 요청하십니다. 우리는 참행복(진복팔단)을 실천하며 그 안에 숨겨진 영광을 빛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길을 나아갈 때, 주님께서는 "나 없이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십니다.

그리스도는 민족들의 빛(Lumen Gentium)이십니다. 오직 그분만이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성령 안에서 활동하시며 세상의 얼굴을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시적인 책략이 아니라 바로 그분께 신뢰를 둡니다.

우리가 인내하는 법을 배운다면 그분은 우리를 통해 일하실 것입니다. 사순시기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향한 사랑 때문에 상처를 입으시고, 수난을 통해 당신 활동의 정점에 이르셨음을 보여줍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희망은 눈물 골짜기가 현대화되고 디지털화되어 깨끗해지는 그런 희망이 아닙니다. 우리의 희망은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죽은 이들의 부활’에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이 희망이 선포되기를 간절히 갈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변의 몇 가지 징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젊은이들 사이의 새로운 종교적 자각, 공적 담론에서 다시 등장한 ‘진리’라는 가치, 그리고 뿌리를 찾으려는 노력이 그것입니다. 세계적인 제도와 동맹들이 무너지고 있으며, 우리는 전략적·생태적·이념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토록 끊임없이 변하는 조건들 속에서 무엇이 지속될 수 있는지 상식과 선의를 가진 이들이 묻는 것은 당연합니다. 모래 위에 삶을 짓는 데 지친 이들은 견고한 반석을 찾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쉬지 못하고 불안해합니다. 공의회 교부들은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에서, 현대인들의 가장 고귀한 열망과 가장 어두운 공포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서도 메아리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참으로 인간적인 것' 가운데 낯선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제 안에서 울리는 이러한 메아리 하나를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일 년 전인 2025년 2월 8일, 미국의 가수 그레이시 에이브럼스(Gracie Abrams)가 마드리드에서 공연을 했습니다. 그녀는 아름답고 부유하며 성공한 젊은 여성입니다. 마드리드 공연에서 그녀는 흰 실크 드레스를 입었습니다. 어깨 위에 늘어진 긴 검은 리본들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웨딩드레스나 기쁨의 예복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리본은 그녀가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의 핵심인 ‘슬픔’을 예견하는 복선이었습니다.

그녀의 가사에는 절망에 가까운, 혹은 절망 그 자체인 깊은 슬픔이 배어 있습니다. 1999년생인 에이브럼스는 그녀의 노래 <Camden>에서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 번도 말한 적 없지만, 스물다섯 이후의 내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어.” 이 노래는 고통을 숨겨야 하는 필요성, 즉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짐을 묻어버리고”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누군가 나의 노력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을 노래합니다. 주문처럼 반복되는 후렴구는 말합니다. “나의 모든 것, 닫아야 할 상처지만 나는 그냥 활짝 열어두네.”

마드리드 공연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왔을 때 한 팬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미쳤다. 말이 안 나온다. 울었다. 죽는 줄 알았어. 죽는 것 같았어.”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 공연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함께 노래했고, 그 비틀린 가사들을 외우고 있었으며,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사춘기 시절의 ‘세계의 고통(Weltschmerz)’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세대마다 이를 표현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슬픔에는 단순히 절망을 탐닉하는 것으로 치부할 수 없는 특별한 성질이 있습니다.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그 외침이 얼마나 깊은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수많은 젊은이가 함께 모여 단조로운 선율에 맞춰 “네가 알아줬으면 했어 / 나는 원래 잘 해내는 사람이 아니야 / 제발 내가 살아남기를 바라”라고 외치는 모습은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희망’이라는 단어가 적절할까요?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가사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늘 곁에 있는 위협 앞에서 느끼는 ‘희망의 부재’입니다.

그레이시 에이브럼스의 팬들은 주로 소녀들입니다. 소년들은 다를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소년들은 삶의 고난을 어둡게 인식하고 이를 야생적인 수염을 기른 남성적 강인함으로 견뎌내려 한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 젊은이들과 대화해 보거나 고해소에서 시간을 보내본 사람이라면, 사안이 그렇게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상처 입었다는 자각은 연기처럼 우리 시대를 자욱하게 메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사순 시기를 지내며, 상처 입고 펼쳐진 한 몸을 응시하고 이곳에 희망이 있다고 단언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수세기 동안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수난 중에 입으신 상처를 보여주는 데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이 온전히 공존한다는 것, 즉 “동정 마리아에게서 나신” 이 사람이 동시에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역설을 말로 정립하는 데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칼케돈 공의회가 이러한 균형을 지키기 위한 개념적 틀을 정교화한 후에야, 그리스도교 정신은 언어뿐만 아니라 예술을 통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신 굴욕을 사실적으로 상상할 자유를 얻었습니다. 십자가 고상은 그리스도교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떠올랐습니다. 적어도 서구에서는 상처 입은 하느님의 형상이 우리 성당과 건물들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고, 공적 의식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자신이 방문했을 때를 상기시키며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여러분에게 간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화해와 자비, 은총을 통한 변화, 기쁨과 영원한 생명을 전파한 이 위대한 설교자의 교리 중심에는 예수님의 구원적 수난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정해진 절차와 미리 설정된 결과라는 측면에서 예측 가능한, 더 유쾌한 복음을 전파하라는 유혹이 강한 문화 속에서 그의 모범을 따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십자가로 어두웠던 옛 대성당의 통로들이 미니 골프장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성지는 이른바 ‘현실성’을 보여주겠다는 명목 아래 세속적인 연극 무대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사이 성당 밖 세상의 광장에서는 젊은이들이 삶은 아물지 않는 상처이며 “길르앗에 더 이상 약은 없다”(예레 8,22참조)고 나지막이 노래하며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상처를 다루는 노력에는 두 가지 상충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한쪽에서는 자신의 상처를 정체성의 증표로 내세우며 이를 전시합니다. 정의를 요구하기 위한 타당한 이유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 베르나르도가 설명했듯, 우리가 상처에만 집착하여 자아를 형성한다면 동기 부여의 관점을 잃게 됩니다. 우리는 분노에 빠질 위험이 있으며, 분노는 치유를 향한 갈망 대신 자기합리화만을 남깁니다. 분노와 그 거울인 비탄은 우리를 자아도취적인 절망 속에 가두어버릴 수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상처를 아예 지워버리려 합니다. 상처는 존재해서는 안 되며, 존재한다면 그 아픈 부위를 제거해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스며듭니다. 모든 것이 거래로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생산적이지 못한 존재는 설 자리가 없으며, 이상 징후로 취급되어 가혹하게 다뤄집니다. 이런 태도는 낙태와 안락사 논쟁, 그리고 반복되는 우생학적 담론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부적격자들을 격리하거나 벼랑 끝으로 내몰려는 일부 정치인들의 디스토피아적 꿈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공공 의식 속에서 ‘'상처 입었으나 굴복하지 않은 분’인 십자가상의 그리스도가 사라진 것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인내와 구원적 고난의 가치를 긍정하는 이미지를 삶의 척도로 삼는 문명은 시간이 흐르며 변화합니다. 그런 문명은 타락한 인류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을 넘어 ‘공감’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상처에 대한 공경은 수세기 동안 그리스도교의 감수성을 규정해 왔습니다. 이는 수난 성물에 대한 신심, 십자가의 길, 시와 그림, 르네상스 시대의 ‘예레미야 애가’부터 바흐의 수난곡, 19세기 찬송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 작품으로 나타났습니다. 혁명의 광기 속에서 전 세계로 퍼져나간 예수 성심 공경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 중심에는 인간 조건의 본질인 고난의 거대한 신비에 대한 경외심이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동시에, 상처가 결코 최종적인 것이 아니며 치유될 수 있고 오히려 치유의 근원이 될 수 있음을 선언합니다.

이 신앙의 신비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반복되는 기만들에 맞서 건설적인 저항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완벽함만을 추구하며 국가와 사회가 운영되어야 한다는 정치적 기만, ‘건강함’의 척도를 내세워 살 가치가 있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을 나누는 인류학적 기만, 상처에 치명적이고 숙명적인 힘을 부여하는 문화적 기만, 그리고 한밤중에 우리 귓가에 “영원히 이럴 거야”라고 속삭이며 절망하게 만드는 심리학적 기만에 맞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가 분노 없이 애통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것은 우리를 ‘자비(compassion)’로 이끕니다. 자비는 욥과 같이 지복직관의 관점을 준비하게 하는 인식의 열쇠입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으나,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뵙습니다.” 우리도 토마스 사도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분을 향해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복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상처가 제거된 것이 아니라 ‘영광스럽게’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리스도의 기름과 술이 부어질 때 세상의 상처 또한 그렇게 영광스럽게 변할 수 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십자가는 상징인 동시에 사건의 기억입니다. 그리스도 수난의 상징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해석하는 것이지, 우리가 그분을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의 생산’에 매몰된 상징적 자본주의의 흐름을 거슬러 갈 때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가상 세계에서 ‘사실’은 가공된 산물입니다. 이야기와 이미지, 데이터는 소비를 지속하기 위해 거래됩니다. 무언가를 이해함과 동시에 변화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결과적으로, 혼란을 주려고 설계된 오늘날의 공적 담론에서 ‘명료함’의 가치는 작아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이해를 갈망합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왜?”라고 묻는 존재입니다. 인간에게는 교회의 명료한 사상과 그리스도 중심의 희망이 필요합니다. 확실한 방향 감각이 필요하고, 세상의 것과는 다른 실재적인 상징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상처 입은 몸, 극복된 죽음, 그리고 영혼과 육신으로 구성된 온전한 인간의 영원한 운명에 집중된 상징입니다. 우리 신앙의 숭고한 전망은 실제로 일어났고,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친교 안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 근거합니다. 우리는 변모시키는 인자하심(Benevolenza)이 인간 고통의 가장 극심한 지점까지, 심지어 지옥의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으며, 따라서 어떤 황폐함도 최종적이지 않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복음입니다.

우리 시대는 이 복음을 간절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공원에서 슬퍼하는 젊은이들이 이를 갈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타협 없이 진리를 제시하고 드러낼 줄 아는 그리스도인들, 우리 삶을 새롭게 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보여주는 이들이 "권위를 가지고" 전할 때 귀를 기울입니다.

1139년 클레르보에서, 성 베르나르도는 파스카 전야에 시편 91편(90편)에 관한 마지막 강론을 하셨습니다. 거기에는 경주를 마친 선수의 기쁨이 느껴집니다. 성 베네딕토는 수도자의 삶이 그리스도의 승리에 초점을 맞춘 '지속적인 사순 시기'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전례 시기는 존재 자체의 의미를 드러내 줍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그 연결고리를 명확히 합니다. 삶의 시련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게 해 주는 산고입니다. "삶이 생생하고 활기찬 곳에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충만하게 살고 열매를 맺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환난 속에 '영광의 희망'이 있다고 말하다가, 이내 말을 고쳐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열매가 씨앗 안에 있듯 영광은 환난 안에 있다고 말입니다. 그는 외칩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를 위해 환난 속에 영광이 숨겨져습니다. 이 짧은 순간 속에 영원함이, 이 가벼운 짐 속에 숭고하고 헤아릴 수 없는 무게가 숨겨져 있습니다."

완전한 반전입니다. 지금 우리를 짓누르는 무게는 지속적인 실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영광의 무게가 우리를 저 높은 곳, 장엄하고 다채로운 영광으로 끌어올립니다. 그리스도의 삶에 온전히 참여하도록 형성된 우리는, 시편 91편에서 "환난 중에 내가 그와 함께하리라"고 선포하시는 하느님의 인내 어린 기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또한 "나의 즐거움은 사람의 아들들과 함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라고 응답합니다. 그리고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고 덧붙이며, 참된 그리스도교적 성숙을 향한 은총의 성장이 지닌 성모 마리아적 성격을 섬세하게 묘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갈망하고 무엇에 목말라하는지, 우리의 갈증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너무 적은 것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누구의 모상으로 만들어졌는지, 은총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 알고 선포해야 합니다.

이 마지막 강론을 마친 다음 날 아침, 성 베르나르도는 부활 대축일 입당송 ‘Resurrexi(내가 부활하였도다)’를 노래하기 위해 성가집을 폈을 것입니다. 이 성가는 위를 향하는 숭고함을 담은 제6선법, 엄숙한 선법(Modus Gravis)의 아름다운 곡입니다. 이 전례곡은 고요한 경이로움 속에서 부활을 선포합니다. 비어 있는 무덤 앞에서,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영원한 포옹 속에서 교회의 찬미를 드높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승리로 마침내 그 포옹 속으로 이끌려 들어갈 때, 우리는 우리가 보이는 그대로 보게 되고, 우리가 알려진 그대로 알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우리는 완벽하게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여전히 부분적으로 알고 보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밤을 지키며 깨어 있습니다. 우리는 일하고 봉사하며 가르치고, 필요할 때 투쟁합니다. 우리는 "우리 믿음의 창시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려 노력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그분께서 우리의 등불이십니다. 그분의 부드러운 빛은 비록 숨겨져 있을 때라도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번역 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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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2월 2026, 2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