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ercizi spirituali di Quaresima per Papa Leone Esercizi spirituali di Quaresima per Papa Leone  (ANSA)

교황청 사순시기 연례피정: “넘어짐은 겸손하게 만들 수도 있고 파멸로 끌고 갈 수도 있습니다”

오늘 2월 25일 오전, 파올리나 경당에서 레오 14세 교황과 교황청 장관들을 위한 사순 여섯 번째 묵상이 진행되었다. 트론헤임의 노르웨이 시토회 출신 에릭 바르덴 주교는 “구원의 여정”에서 필요한 단계가 될 수 있는 넘어짐과, 반대로 파멸을 불러오는 넘어짐에 대해 성찰했다. 특히 학대 사례와 이를 인지하지 못한 오류를 언급하며, “영적 삶의 진보는 관상적 성숙을 요구하며 모든 이원론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Vatican News

수천의 넘어짐
2026년 2월 25일
사순시기 연례피정, 6번째 강론

다음은 바르덴 주교 자신이 요약하여 제시한 묵상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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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짐은 오만으로 가득 찬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 능력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또한 감사와 함께 기억해야 할 개인적인 구원의 여정에서 이정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순진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넘어짐이 기쁨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넘어짐은 지옥의 냄새를 풍기며, 가해자를 파멸과 몰락의 길로 끌어들입니다. 이 흔적은 종종 넓고 길어서 수많은 무고한 이들을 휩쓸어 버립니다. 우리는 베르나르도 성인과 함께, 시편 91장(90장)의 구절인 “네 곁에서 천 명이, 네 오른쪽에서 만 명이 쓰러져도”라는 말씀에 다가갈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의 집 안에서 자라난 부패보다 더 비극적으로 교회를 해치고 우리의 증언을 훼손한 것은 없습니다. 교회의 가장 끔찍한 위기는 세상의 반대가 아니라, 교회 내부의 부패로 인해 초래했습니다. 그 상처가 치유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것은 정의와 눈물을 요구합니다.

부패, 특히 학대 문제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흔히 그 ‘병든 뿌리’를 찾으려 합니다. 무시된 초기 경고나 식별의 오류, 혹은 태생적인 일탈 패턴을 발견할 것이리라 기대하곤 합니다. 때로는 그러한 흔적들이 실제로 존재하며, 이를 제때 알아차리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하는 것이 옳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늘 그런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날 스캔들과 연루된 공동체라 할지라도, 그 시작 단계에서 나타났던 크고 기쁜 선(善)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구조적인 위선이 있었다거나, 설립자들이 냉소적으로 ‘회칠한 무덤’처럼 자신을 꾸몄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참된 영감이나 성덕의 흔적조차 발견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선한 발전과 기형적인 타락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 것일까요?

세속적인 사고방식은 대개 여기서 포기하고 맙니다. 재난 앞에서 그저 ‘괴물’과 ‘희생자’를 지정할 뿐입니다.

다행히 교회는, 그것을 기억하고 사용하기만 한다면, 더 정교하고 더 효과적인 도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 베르나르도 트락투스는 인간이 고귀한 노력을 추구하는 곳일수록 원수의 공격이 더욱 격렬해진다고 일깨워줍니다. 그는 “교회의 영적 지체들은 육적인 지체들보다 훨씬 더 가혹하게 공격받는다”고 관찰합니다. 그는 시편 ‘Qui habitat’(하느님 안에 거주하는 이)에서 말하는 ‘왼쪽’과 ‘오른쪽’의 언어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왼쪽은 우리의 육체적인 본성을, 오른쪽은 영적인 본성을 상징합니다. 오른쪽에서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는 이유는 영적 전쟁터에서 가장 치명적인 무기가 사용되는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악마의 영역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모든 영적 질병을 뿔 달리고 쇠스랑을 든 악당의 탓으로만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주권적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핵심 요지는 인간의 본성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본성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다른 깊은 심연들도 함께 드러납니다. 우리는 실존적인 갈망, 취약성, 위로에 대한 욕구와 마주하게 되며, 이러한 경험들은 일종의 공격과 같은 형태를 띨 수 있습니다.

영적 삶의 진보는 우리의 육체적·정서적 자아가 관상적 성숙과 조화를 이루도록 형성되는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 노출이 육체적 혹은 정서적 배출구를 찾을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한 분출을 마치 보통 사람들의 잘못과는 다른, 어떤 ‘영적이고’ 고차원적인 것인 양 합리화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영적 스승의 온전함은 그의 대화와 가르침에서 드러날 뿐 아니라, 온라인에서의 습관, 식탁과 커피숍에서의 행동, 타인의 아첨으로부터의 자유로움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영적 삶은 존재의 나머지 부분에 덧붙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의 영혼입니다. 우리는 모든 이원론을 경계해야 합니다. 말씀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의 육체가 ‘말씀(Logos)’으로 스며들게 하시기 위함임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왼쪽과 오른쪽 모두를 경계해야 하며, 특히 이 둘을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성 베르나르도 성인이 강조하듯, 우리는 왼쪽과 오른쪽 모두를 경계해야 하며, 둘을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육적인 본성과 영적인 본성 모두에서 평온함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스승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두 영역 모두에서 평화롭게 다스리실 수 있습니다.

 

번역 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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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월 2026, 2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