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ercizi spirituali di Quaresima per Papa Leone

교황청 사순시기 연례피정: 진리의 광채, 거룩함을 향한 사랑의 길

파올리나 경당에서 레오 14세 교황과 로마 교황청 장관들을 위한 사순 묵상이 진행되었다. 오늘 2월 24일, 노르웨이 트론헤임의 수도자이자 주교인 에릭 바르덴(Erik Varden) 주교가 전한 성찰은 '유혹'과 그에 맞서는 '저항의 헌신'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우리가 "거짓에서 멀어질 때 비로소 참된 회개로 나아갈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찾는 여정 속에서, 교회는 세상의 유행이 아닌 성경과 성인들의 언어, 즉 '교회 본연의 언어'로 말하도록 부름받았다고 말했다.

Vatican News

 

진리의 광채

2026년 2월 24일

사순시기 연례피정 5번째 묵상


다음은 바르덴 주교 자신이 요약하여 제시한 묵상 내용이다.

***

성 베르나르도 트락투스는 우리에게 늘 깨어 있으라고 당부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께 경고합니다. 이 세상에서 유혹 없이 사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 우연히 유혹에서 벗어난 이가 있다면, 그는 분명 또 다른 유혹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도우심에 대한 신뢰와 우리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경계 사이에서 올바른 균형을 길러야 합니다. 유혹을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 유혹에 맞서게 하시는 것은 그것이 유익하기 때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유익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거짓의 아비가 쏘는 화살을 견디어 낼 때, 진리에 대한 우리의 헌신은 더욱 굳건해지고, 진리에 대한 우리의 신뢰 또한 깊어질 것입니다. 우리를 약화시키는 거짓에서 멀어질 때, 우리는 회개하여 형제들을 굳건하게 할 수 있게 됩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야망을 진리를부정하는것으로 보았습니다. 야망은 그다지 미묘하지 않은 탐욕의 한 형태입니다. 이 악덕을 묘사함에 있어, 언제나 달변가인 성 베르나르도는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통찰을 보여줍니다. 야망은 “교묘한 악이며, 은밀한 독이고, 숨은 역병이며, 기만의 조성자입니다. 위선의 어머니요, 시기의 어머니이며, 악덕의 근원입니다. 그것은 범죄에 불을 붙이는 불씨이고, 덕을 녹슬게 하며, 성덕을 썩게 하고, 마음을 눈멀게 합니다. 치료제를 병으로 바꾸고, 약에서 쇠약을 낳습니다.”

그는 또 말합니다. 야망은 “정신의 소외”에서 비롯됩니다. 이는 진리를 잊을 때 드러나는 광기입니다. 야망이 정신적 불균형의 한 형태라는 사실은,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 우스꽝스럽게 만듭니다. 특히 타인을 섬기도록 소명 받은 이들에게서 두드러질 때 더욱 그렇습니다. 괜히 야망에 찬 사제의 모습이 문학과 영화에서 하나의 희극적 모티프로 반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에 등장하는 비굴한 본당 신부들에서부터, 파트리스 르콩트의 인상적인 영화 《리디큘》에 등장하는 독설적인 궁정 사제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풍자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진리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혼란과 두려움, 조급함 속에 살아가면서도 진지하게, 그리고 종종 선의를 지니고 이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그들을 답 없이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두려움과 허영, 야망으로 이루어진 사소한 유혹에 우리의 힘을 낭비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가장 소중한 자원은 실체적이며 본질적인 진리를 지탱하는 데 쓰여야 합니다. 그 진리는 다소 번쩍이거나, 다소 악의적인 모든 대용물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줍니다.

오늘날 세계의 복잡성 안에서,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세상을 명확히 표현하는 일은 필수적입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보호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그리고 점점 더 자신이 허무의 종살이 상태에 있음을 자각하는 피조물에게 우리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드러내기를 갈망하십니다.

때로 우리는 세상의 유행에 발맞춰야 한다는 유혹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는 말하자면, 매우 의심스러운 방식입니다. 교회는 천천히 움직이는 몸입니다. 자칫하면 철 지난 옷을 입거나 어제의 유행어를 내뱉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대신 교회가 고유의 언어, 즉 성경과 전례, 신앙의 선조들, 그리고 지금도 태어나고 있는 시인과 성인들의 언어를 제대로 구사한다면, 영원한 진리를 ‘새롭게’(noviter) 선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교회는 독창적이고 신선한 모습으로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문화를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중대한 지적 차원을 지닌 작업입니다. 동시에 실존적 차원도 지니고 있습니다. 슈스터 추기경은 임종 직전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우리의 설교에 더 이상 설득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덕의 현존 앞에서는 여전히 믿고, 여전히 무릎을 꿇고, 여전히 기도합니다.”

모든 이가 거룩함으로 부름받았다는 것(보편적 성덕으로의 부르심), 곧 진리를 ‘육화’(incarnare)하라는 부르심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장 강력한 메시지였습니다. 이 부르심은 공의회의 모든 결정 사항 속에서 웅장한 징소리처럼 장엄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주장하는 진리는 그 광채가 인격적인 형태로 나타날 때, 즉 타협이라는 유혹을 떨쳐내고 자기희생적인 사랑과 거룩함으로 드러날 때 비로소 설득력을 얻게 됩니다.

 

번역 박수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용시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고, 임의 편집/변형하지 마십시오)
 

25 2월 2026, 14: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