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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ercizi spirituali di Quaresima per Papa Leone Esercizi spirituali di Quaresima per Papa Leone  (ANSA)

사순 시기 연례 피정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월 24일 오전, 레오 14세 교황과 교황청 장관들을 대상으로 교황청 파올리나 경당에서 열린 사순 시기 연례 피정 네 번째 묵상에서 트론헤임의 노르웨이 시토회 출신 에릭 바르덴 주교는 자유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개념을 설명했다. 곧,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세상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되도록 우리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려고 열망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경우 우리가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을 거부할 때, 그 고통이 정의의 원동력이 된다는 점을 깨닫게 하신다.

Vatican News

 

자유로워지는 것은

2026년 2월 24일
사순시기 연례피정 4번째 묵상

다음은 바르덴 주교 자신이 요약하여 제시한 묵상 내용이다.

***

“자유”라는 개념은 공개 토론장에서 논의의 대상이 됐습니다. 자유는 우리가 아주 소중히 여기는 유익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제한하거나 억압하려고 위협하는 모든 것에 강력히 반대합니다. 그러므로 자유라는 단어는 가장 효과적인 수사학적 표현의 도구입니다.

특정 집단의 자유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즉시 인터넷에 분노가 들끓는 반응이 쇄도합니다. 심지어 광장에 시위대가 몰려들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어떻게 유럽에서 다양한 정치적 사안이 자유라는 용어를 남용하여 긴장을 초래하는지 충격을 줍니다. 사회의 한 계층이 “해방적”이라고 인식하는 바가 다른 계층에게는 억압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모든 정당이 자유라는 깃발을 높이 내걸고 대립 전선을 조성합니다. 자유화라는 미명 아래 내세운 양립할 수 없는 계획이나 공약들로 인해 격렬한 갈등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의 도전을 제시합니다.

신앙의 맥락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 베르나르도가 “그분께서 사냥꾼의 올무와 사악한 말에서 나를 구하셨도다”(*역주-시편 91[90],3의 불가타 역 참조)라는 구절을 해설할 때 했던 일입니다.

베르나르도에게 있어서 진정한 자유가 타락한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것은 우리 방식대로 행하고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키며, 간섭 없이 우리의 계획을 실행하고, 우리의 생각을 과시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베르나르도는 환상에 빠진 사람을 향해 신랄하게 비꼬며 다음과 같이 요구합니다. “잘난 척하는 이여, 그대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그대야말로 사냥꾼의 올무에 걸린 짐승이 되어버렸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오.”

이미 잘 알고 있어야 함에도, 우리가 너무도 쉽게 속아 넘어가고 낡아빠진 함정에 빠진다는 사실은 그에게 있어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근거, 다시 말해 우리가 삶의 참된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갈 능력이 없다는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우리는 여전히 온갖 형태의 장애물과 혼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베르나르도는 성자께서 성부의 뜻에 무조건적으로 ‘예!’라고 응답한 것에 토대를 두고 자유를 설명함으로써,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혁신적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사랑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그 사랑은 세상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되도록 우리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려고 열망할 정도로 아량 넓은 것입니다.

권력의 인질이 된, 자유가 “당”과 “경제”, 혹은 심지어 “역사”와 같은 비인격적인 주체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조작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어떤 억압적인 정책도 이념적인 “해방”을 내세운다고 해서 구제될 수 없습니다. 유일하게 중요한 자유는 개인의 자유뿐입니다. 그리고 한 개인의 자유가 다른 이의 자유를 말살할 수는 없습니다.

자유에 대한 그리스도인 사상을 규정하는 것은 고통을 함축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악한 자에 대항하지 말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에게 불의를 용납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 우리가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을 거부할 때, 그 고통이 정의의 원동력이 된다는 점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자유의 상징은 여전히 “당신 자신을 비우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번역 이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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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월 2026, 14: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