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 사순시기 연례피정 “어떻게 하느님의 도우심 속에 살 것인가”
Vatican News
하느님의 도우심
2026년 2월 23일
사순시기 연례피정 3번째 묵상
다음은 바른덴 주교 자신이 요약하여 제시한 묵상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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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교육자였던 메리 워드(Mary Ward) 수녀는 동료 수녀들에게 늘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려움 속에서 우리를 도우실 수 있으며 또 도우시기를 원하신다는 생각은 성경적 신앙의 근간을 이루는 자명한 진리입니다. 이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비 자체로 육화하신 하느님을 철학에서 말하는 ‘부동의 동력자(Motore Immobile)’와 구별 짓는 지점입니다.
시편 91장(대중 라틴어 성경 90장)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합니다. “Qui habitat in adiutorio Altissimi”, 곧 “지극히 높으신 분의 보호 속에 사는 이, 전능하신 분의 그늘에 머무는 이”라는 뜻입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트락투스는 하느님의 도우심을 하나의 ‘거처’로 정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도움은 우리를 지탱해 주는 실재이며,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가고 움직이며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도움은 (어쩌다 한 번 일어나는) 우발적인 것이 아닙니다. 집에 불이 나거나 누군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112에 전화하듯 요청하는 응급 서비스가 아닙니다.
그러나 경건한 이들이 넘어지고, 마치 버림받은 듯 보이는 경우에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하늘을 향해 부르짖지만 아무런 응답도 얻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메아리만을 쓸쓸히 들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성경에서 이러한 상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은 욥입니다. 장엄한 욥기는 세 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교향곡과 같습니다. 그것은 뼈아픈 ‘탄식’에서 시작하여, 우리를 옥죄는 ‘위협’을 거쳐, 마침내 예기치 못한 ‘은총’의 체험으로 나아갑니다.
욥은 친구들의 합리적인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마치 회계장부를 정리하듯 자신의 인생을 계산하고 계신다고 생각하기를 거부합니다. 그는 고통 한가운데에서도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찾기로 결심하며 영웅적으로 외칩니다. “그분이 아니시라면, 대체 누가 이것을 하실 수 있겠는가?”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때때로 종교를 일종의 ‘보험’으로 여길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하리라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불행이 닥치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나를 보호하던 울타리를 허물어뜨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을 나는 어떻게 마주하고 있습니까? 나의 하느님 관계는 일종의 ‘거래’입니까? 그래서 상황이 힘들어지면 욥의 아내처럼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리라”는 유혹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이라고 여겼던, 그러나 사실은 우리를 질식시키고 있었던 그 벽들을 허무신 뒤, 새롭고 복된 세상을 가능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트락투스가 가르치듯, 하느님의 도우심 안에 머문다는 것은 안전을 흥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탄식과 위협을 통과하여, 더 깊은 차원에서 은총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이들 또한 그 은총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번역 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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