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 2월 19일
71. 이 시점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한 가지 문제가 제기됩니다. 성경에는, 이를 부지런하고 깊이 묵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계명—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이들에게 선을 행하며 우리를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명령—에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많은 구절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언서들에서도 원수들을 향한 수많은 악담, 즉 저주처럼 보이는 말들이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그들의 식탁이 그들 앞에서 덫이 되고” (시편 69, 23)라는 말씀과 그 대목에서 이어지는 내용들이 그러합니다. 또한 “그의 자식들은 고아가,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게 하소서”(시편 109, 9)라는 구절과, 동일한 시편 내에서 예언자의 입을 통해 유다를 거슬러 앞뒤로 언급된 모든 말씀이 그러합니다. 이 밖에도 성경 곳곳에는 주님의 이 계명, 그리고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로마 12, 14)라고 한 사도의 말과 상반되어 보이는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주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을 듣지 않은 고을들에 불행을 선언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며(마태 11,20-24), 사도 바오로 역시 어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주님께서 그의 행실대로 그에게 갚으실 것입니다” (2 티모 4 ,14).
72. 이러한 표현들은 쉽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예언자가 그러한 저주의 언사들을 사용한 것은 그 내용이 실제로 일어나기를 바랐기 때문이 아니라, 장차 일어날 일을 내다보았기 때문에 미래를 예언한 것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과 사도께서 하신 말씀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설명됩니다. 즉, 그분들의 말씀에는 어떤 나쁜 열망이 담긴 것이 아니라 앞날에 대한 예고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불행하여라, 너 카파르나움아!”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는 그 고을의 불신앙으로 인해 닥쳐올 재앙을 예언하신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악한 마음으로 이를 바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거룩한 권능으로 그 결과를 예견하신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오로 역시 “주님께서 그에게 갚으시기를”이라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그의 행실대로 그에게 갚으실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누군가를 저주하는 자의 표현이 아니라, 앞날을 예고하는 자의 표현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주님은 유대인들의 위선과 그들에게 닥칠 파멸을 목격하시며 “회칠한 벽 같은 자, 하느님께서 당신을 치실 것이오!”(사도 23,3)라고 말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언자들은 장차 일어날 일을 예언할 때 저주의 형식을 빌려 표현하곤 하며, 때로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마치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처럼 표현하기도 합니다. “어찌하여 민족들이 술렁거리며 겨레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시편 2,1)라는 구절이 그러합니다. 여기서 예언자는 “어찌하여 민족들이 술렁거릴 것이며 겨레들이 헛된 일을 꾸밀 것인가?”라고 미래형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과거의 일을 회상하듯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제 옷을 저희끼리 나누어 가지고 제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습니다.”(시편 22,19)라는 다른 구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경우에도 “그들이 제 옷을 나눌 것이며 제 속옷을 놓고 제비를 뽑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의 차이가 사실의 진실성을 저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듣는 이의 마음속에 깊은 감흥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그 누구도 이러한 성경의 표현들을 비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번역 박수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용시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고, 임의 편집/변형하지 마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