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 1월 1일
26. 성경은 다음과 같이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마태 5, 23-24).
이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형제”는 앞서 언급한 대로 원망을 품고 있는 이웃을 가리킵니다. 이어지는 문장이 접속 부사 “그러므로”로 시작되어 앞 문장과 논리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그다음 만일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한다면”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한다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무 이유 없이 형제에게 노여움을 품거나 ‘바보(Racha)’라든지 ‘멍청이’와 같은 말로 비난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면, 마음속에 품은 원한을 오래 간직하여 그것이 미움으로 변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더 용납될 수 없다는 점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이는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에페 4, 26)라는 가르침과도 상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제단에 예물을 바치러 가던 중에 형제가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음을 깨달으면,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형제와 화해한 뒤 다시 돌아와 예물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만 해석한다면, 어떤 사람은 형제가 바로 그 자리에 있을 때만 그와 화해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물을 제단 앞에 두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더 이상 봉헌을 미룰 수 없다고 여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부재중인 형제와 관련된 것이라면, 예를 들어 그 형제가 바다 건너 먼 곳에 있다면, 예물을 제단에 놓아둔 채 땅과 바다를 헤매며 그를 찾아다닌 뒤에야 비로소 예물을 바쳐야 한다고 믿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단순한 문자적 행동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이 말씀의 참된 뜻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번역 박수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용시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고, 임의 편집/변형하지 마십시오)
